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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홍승은 작가/20200214

by 주영씨 2020. 2. 15.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읽으면 읽을수록, 홍승은이라는 작가에게 빠져들었다.

인문학 카페 36.5를 운영하는 저자답게 그 깊이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도감이 느껴졌고 지난 과거에서부터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중학교 때, 남은 친구라고는 딱 한 명밖에 없던 외로운 시절. 반에 가도 친구가 없었다. 이런게 전따라는 건가. 깊은 고립감과 불안함. 학교에 가도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슬펐다.

너무 힘들어서 학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을 모두가 내 탓을 했다. 이미 내 탓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는데 또다시 세상은 나에게 내 탓을 하라고 강요했다. 너무 힘들었다.

자기연민에 깊숙히 빠졌다. 나를 건져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심각했을 때는 내 바지가 내려간 줄도 모르고 얼 빠진 사람처럼 몇 분을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데 아무 이유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우울했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때 나에게 위로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은 모두 강한 사람의 편이었고 나에게는 정형화된 피해자의 모습을 강요했다. 어떤 게 피해자로서의 모습이길래.

 

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학교폭력을 당한 아들의 문제라니, 부부의 말을 듣다가 울컥한 나는 두 분에게 오히려 아드님이 건강한 것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학교의 강압적인 위계질서, 무한경쟁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도 청소년기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 부적응이 오히려 새로운 일터와 일상을 창조하는 데 훨씬 큰 영감과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드렸다.”

나도 울컥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고 누구도 편이 되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이해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 때 나는 자살을 하고 싶었다. 용기가 없어서 못했지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고통의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고통을 외면한 희망의 언어보다 고통을 응시하는 정직한 절망의 언어가 나를 살아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적어도 스스로를 외면하지는 않으니까.”

작가와 나는 연결되는 점이 꽤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변에 친구도 거의 없지만 저자는 카페를 운영하며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마음 속의 응어리가 나아지고 있는 것, 예민하고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 말이다. 물론 방향이 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저자에게 너무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녀의 존재 덕분에, 나는 또 용기를 얻고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노트에 필사를 하게 되었다. 말들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긴 시간 고민하고 상처받으며 아파본 한 사람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책에서의 말들


●타자를 만나고 목소리를 듣는 일은 내게 매번 충격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중요한 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계기였다. 내가 얼마나 타자와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지 발견하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자의 존재를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다.

모든 변화의 시작이 그렇듯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먼저 의심해야 한다. 자연스럽다고 해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예민함이 쓸데없는 지레짐작과 망상으로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무뎌지고 싶지 않다. 나는 계속 예민해야지. 절대 무뎌지지 말아야지, 라고 되뇌었던 옛 일기장의 다짐처럼 나는 아직 예민하다. 다행이다.

차별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엄마만의, 청소 노동자만의,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투명인간을 거부하고 실재하겠다는 사람의 외침은 그래서 언제나 소중하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나의 게으름은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누리는 권력이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노동에 기대어 편리함을 누렸을까. 얼마나 많은 차별 속에서 모른 척 편리함을 누렸을까.

존재 본연의 외로움과 불확실함.

자신이 언제나 '피해자'라는 인식과 '운동가'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나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건 무척 어렵다.

내 사소한 생각과 말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폭력에 돌 하나 얹는 행위라는 걸 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낮아져야 한다. 보다 더 예민해져야 한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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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어요. 아는 게 편하기만 하면 무슨 소용일까요? 저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담해왔던 세계를 직면하면, 나도 모르는 새 저질러왔던 폭력이 선명해지면서 자책과 후회, 부끄러움이 밀려와요. 동시에 내가 폭력인 지 모르고 당하고 지나쳐왔던 일이 선명해지면서 분노와 슬픔이 밀려오고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 속에서 상처받는게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도 '정상'의 범위에서만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당장 상대가 앎을 삶으로 잇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알게끔 해주는 건 중요한 일 같아요. 침묵이 평화가 아니듯, 모른다고 폭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아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가 불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상처받더라도, 적어도 전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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