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론>을 공부하며 궁금해서 찾아보게 된 영화.
기대를 하며 버닝을 틀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2018년 개봉.
이창동 감독의 <밀양> 이후 8년만의 작품이다.
Q1. 제목이 왜 버닝인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뜻인가. 사랑은 불장난이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활활 탔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종수의 마음에 불을 지핀 그녀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태우다는 영어로 Burn.
어학 사전에 검색해보니 Burn이 불에 태우다, 타다라는 뜻도 있지만 개울이라는 뜻도 있다.
Burn(개울)에 빠졌었던 그녀가 종수의 마음을 Burn(태우다)하고 벤에 의해 Burn(태워 없애다)되어버린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가 벤을 칼로 찔러 벤의 차 포르쉐에 태워 불태운다. 벤은 차에 '탔'고 불에 '탔'다.
Burning: 1. 불타는, 갈망하는 2. 화급한 사안/문제 3. 타는 듯한(화끈거리며 따가운)
불타듯 갈망하다 모든 것이 타올라 재처럼 사라졌다.
_이게 맞을까?
Q2. 어떤 것이 실재인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사실인가, 현재 그녀(해미)가 사라진 것은 사실인가. 해미는 종수를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과거 이야기를 한다. 어릴 적, 깊은 우물에 빠져서 도와줄 사람없이 몇 시간 째 동그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종수가 나타났다고 했다.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처한 생활고와 힘든 생활을 투영해 지어낸 거짓말인가. 나중에 종수가 찾아간 해미네 가족이 하는 분식집에서 그는 그들에게 해미가 우물에 빠졌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비웃는 듯 해미는 원래 이야기를 잘 지어낸다고 말하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미가 카드빚 갚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오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한다. 해미가 과거의 해미이기는 한 건지, 우물이 실재했는지 나도 헷갈렸다. 종수는 마을회장님께도 물어보고 빚 500만원 때문에 16년 만에 연락이 닿은 엄마에게도 물어본다. 엄마는 물기 없는 작은 우물이 있었다고 대답한다.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는 해미다. 믿을 곳도 기댈 곳도 없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Q3. 과거 회상 장면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과거에 대해서 영화는 불친절하다.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것은 종수가 벤을 쫓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도 모호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 종수가 벤을 찔러 죽이고 그의 포르쉐와 함께 태워버린 것도 그의 꿈은 아닐까.
Q4. 종수가 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벤의 화장실 서랍에서 발견된 해미의 물건들, 해미의 고양이 보일.
2달에 한 번꼴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 여성에 대한 바람기의 메타포 아니면 연쇄살인마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런데 영화는 어느 곳에서도 해미와 벤에 대해 자세히 개입하지 않는다. 잔인한 장면 하나 없다.
카메라는 그저 종수의 시선과 감정, 행동들을 따라간다.
종수는 벤이 위대한 개츠비처럼 돈은 많은데 어디서 나오는 지 모를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종수는 자신의 낡은 트럭과 비교되는 멋진 포르쉐를 타고 넓은 집에서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는 벤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잘 사는 것에 대한 부러움 그 자체보다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종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해미를 흥밋거리로 옆에 두고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이 혐오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부러웠을 것이다.
Q5. 우물의 의미는?
우물은 한국의 대다수 젊은이들이 속해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방구석 1열>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이창동 감독이 젊은이들을 청춘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양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청춘은 무슨,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는 이들이기에. 돈도, 뚜렷한 미래도, 희망도 없는 우리들은 모두 우물 속에 빠져있다.
나도 그렇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금전적인 제약이 많고 걱정도 많다. 'Burn'의 개울이라는 뜻처럼 미래에 내가 빠져있던 곳이 개울이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물 밖 개구리가 되고 싶다는 소리다.
별 볼 일 없는 해미(전종서)와 종수(유아인) 그리고 영앤리치 벤(스티븐 연)이 <버닝>의 주인공이다.
첫 장면에서 해미는 팔다리가 드러난 옷을 입고 춤추며 행사 진행을 돕는 일을 한다. 종수는 택배물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을 하다 마주친 해미가 그를 알아본다. 그들은 어린시절 같은 동네 (경기도 파주시) 친구다.
해미와 종수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허름한 해미의 자취방으로 간다. 해미는 그곳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지만 종수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좁은 침대 위에서 관계를 가진다.
불같이 사랑을 나누고 얼마 뒤, 해미는 자신이 곧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던 날, 해미는 젊고 돈 많은 사내 벤과 함께다.
그 둘은 그곳에서 친해져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해미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한다.
리틀 헝거는 배고픈 사람이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이유에 대해 배고파하는, 진정으로 굶주린 사람이라고 말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말할 때 육체는 건강하지만 영이 굶주렸다고 한다.
보잘 것 없는 삶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고 싶은 해미의 몸부림은 그녀가 아프리카로 떠나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타오르듯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늘로 손을 뻗고 괴상한 춤을 추며 눈물을 흘리던 해미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종수와 벤 앞에서 상의도 다 벗어버린 채 무언가에 홀린 듯 춤을 췄다.
어린시절 우물에 빠졌을 때 몇시간 째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종수가 나타나 도와주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벤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외톨이 해미는 종수를 특별한 친구로 생각한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과도 연락하지 않는 해미는 무엇인가에 홀려서 구출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미행한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 벤에게 불길한 예감을 느껴서다.
그리고 그의 집 근처에 미행을 갔다가 벤에게 들켰지만 그의 집으로 안내받게 된다.
벤의 새로운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신나게 할 때 하품을 하는 벤을 보며 종수는 과거 해미의 이야기를 듣던 그를 떠올린 듯 집을 나나선다.
엔딩 장면에서 그는 벤의 복부를 수차례 칼로 찌르고 포르쉐에 태워 휘발유로 모두 불태워버린다.
자신이 걸쳤던 옷가지들도 함께. 벌거벗은 채로 떨며 트럭에 오른 종수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종수는 그저 돈 많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벤이 퍽 부러우면서도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이따금씩 혐오스러워하는 것같아 보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그가 종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종수가 그런 그에게 다른 조치가 아닌 살해와 방화를 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앞에서 종수가 벤을 쫓다 꿈에서 깬 장면은 이 장면이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다는 복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해미가 갈망했던 것은 무엇일까?
해미는 사라졌을까? 죽었을까? 자살일까? 벤이 죽였을까?
벤을 살해하고 불태워버린 것은 종수의 꿈이었을까?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영화가 끝나고 생각을 해도 나에겐 물음표만 던져지는 영화였다.
내가 생각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면 그 때 조금 더 덧붙여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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